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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2. 12世 〉18. <광양공>절충장군훈련원판관휘암묘갈명(折衝將軍訓鍊院判官諱巖墓碣銘)
1. 문헌 목록 〉12. 12世 〉20. <태사공>증가선대부휘경효묘갈명(贈嘉善大夫諱景孝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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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광양공>암배숙부인성산이씨묘갈명(巖配淑夫人星山李氏墓碣銘)
(광양공후)12世암(巖)配 숙부인성산이씨묘갈명(淑夫人星山李氏墓碣銘)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 휘 원길(元吉)의 후손인 절충장군(折衝將軍)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 공의 배위 숙부인 성산 이 씨는 성산(星山) 세가(世家)의 명문 출신이시다. 옥천 조 씨(玉川趙氏) 암(巖)에게 출가하였는데 구(舅)의 휘는 명(命)으로 장사랑(將仕郎)이시다. 판관공은 태어날 때부터 기질이 남다르고 성품이 효제(孝悌)스럽고 말이 반드시 충신(忠信)하였다. 부모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기 위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 무과(武科)에 합격하였는데 오래지 않아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하여 들어가 나라 일에 진력하였다. 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화맹(和盟)을 맺으니 한 무신(武臣)의 부인으로 그 내조(内助)의 공도 없이 그 슬픔이 어떠하였겠는가. 공은 적이 물러가자 훈련원 판관을 제수하고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계상(繼尚)과 계생(繼生)을 기르고 딸 하나를 낳았는데 김득명(金得命)에게 출가하였다. 계생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이며 그 아들 필준(弼俊)은 부호군(副護軍)이요 차자는 인의(仁義)이다. 필준의 아들은 운재(運載)요 그의 아들 중신(重信)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이다. 절충장군 훈련원 판관공은 옥천 조 씨(玉川趙氏)로 고려 검교대장군 휘 장(璋)을 시조로,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홍규(洪珪), 그리고 옥천 부원군 휘 전(佺)을 거쳐 문하시중 휘 원길(元吉)은 정몽주 설장수 등과 함께 어지러움을 진정시키고 반정(反正)하여 공양왕(恭讓王)을 옹림하여 그 공으로 옥천 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는데 시호는 충헌(忠獻) 호는 농은(農隱)이시다. 농은공이 四남을 두었는데 영(瑛)은 판서로 호가 요재(樂齋)요 유(瑜)는 부정(副正)으로 호가 건곡(虔谷)이며 근(瑾)은 현감을 지내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염(琰)은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萬尸)와 절제도위(節制都尉)를 지냈다. 현감공의 아들은 개보(介甫)인데 군수를 지냈고 군수의 넷째아들은 계겸(季謙)인데 사직(司直)이요 군수를 지낸 학세(鶴世), 참봉을 지낸 상(祥), 동지 중추부사를 지낸 세호(世鎬)가 공의 고조 증조 조고이다. 공의 훈업(勲業)과 사적은 원종공신록(原從功臣錄)과 「호남상강록(湖南三綱錄)」에 실려 있다. 묘는 순창군 구림면 치천(淄川) 비선동(飛仙洞)이다. 숙부인(淑夫人)은 현모양처(賢母良妻)로서 시부모님을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고 공을 공경으로 섬겼다. 묘소는 순창군 치천(緇川)인데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워 후손들이 의논하여 다시 세우기를 도모하여 十二대손 상훈(尚勳)이 이에 다시 세운다. 西紀 一九九二年 六月 五日 圃隱二十九世孫 民偶 鄭昌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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